비 오는 날이면 다시 듣게 되는 노래, 〈비 오는 날의 수채화〉

비가 내리는 날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강인원, 권인하, 김현식이 함께 부른 〈비 오는 날의 수채화〉다. 이 글은 비 오는 날의 수채화 감상으로 남겨두고 싶은 개인적인 음악감상이다.

앨범 자켓과 메타정보

비오는 날 수채화 1 앨범 자켓
《비오는 날 수채화 1》 앨범 자켓. 출처: Apple Music.
  • 앨범명: 《비오는 날 수채화 1》
  • 주요 아티스트: 강인원
  • 대표곡: 〈비 오는 날의 수채화〉 – 강인원, 권인하, 김현식
  • 발매일: 1989년 11월 10일
  • 장르: K-Pop
  • 수록곡 수: 11곡
  • 저작권 표기: ℗ 1989 퍼플스타
  • 메타정보 출처: Apple Music / iTunes Search API
  • 앨범 자켓 출처: Apple Music 제공 이미지

카세트테이프를 고르던 시절의 음악

이 노래를 처음 들었던 순간은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노래가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샀던 장면은 희미하게 남아 있다. 1990년 말이나 1991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김현식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뒤였다.

당시 나는 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스무 살 무렵이었다. 어느 날 대학로의 한 레코드가게에 들어갔다. 진열된 카세트테이프를 한참 동안 살펴보다가 《비오는 날 수채화》 음반을 골랐다. 김현식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목소리가 담긴 노래를 다시 듣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듣고 싶은 노래가 있으면 검색 한 번으로 바로 들을 수 있다. 제목을 정확히 몰라도 가사 한 줄이나 분위기만 기억하면 금세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그때는 달랐다. 레코드가게에 들어가 진열된 음반을 하나씩 살펴봐야 했다. 카세트테이프를 집어 들고 뒷면의 수록곡을 확인했다. 몇 개를 놓고 한참 고민한 뒤에야 하나를 골랐다.

어쩌면 그래서 그 시절에 샀던 음악들이 지금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음악을 듣기 전에 이미 고르는 시간이 있었고, 그 시간까지 음악의 일부처럼 남아 있다.

영화보다 오래 남은 OST

《비오는 날 수채화》는 영화의 음악으로 기억되는 음반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영화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영화를 봤는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영화는 희미하게 사라졌지만, 노래는 35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비가 오면 다시 떠오른다.

앨범에는 권인하의 〈오래전에〉, 김현식의 〈그 거리 그 벤취〉, 신형원의 〈오늘 하루〉와 〈커피향 가득한 거리〉 같은 노래들이 함께 담겨 있었다. 그리고 카세트테이프를 뒤집어 B면을 재생하면 첫 곡으로 〈비 오는 날의 수채화〉가 흘러나왔다.

영화는 잊혔지만 OST는 남았다. 오래된 음악 중에는 이렇게 원래 붙어 있던 이야기보다 노래 자체가 더 멀리 걸어가는 경우가 있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도 그런 노래에 가깝다.

세 사람의 목소리가 만든 풍경

이 노래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세 사람의 목소리다.

강인원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담담하다. 권인하의 목소리는 힘 있고 선명하다. 김현식의 목소리는 거칠고 쓸쓸하다.

서로 다른 세 목소리는 한 곡 안에서 묘하게 어울린다. 부드러움과 힘, 그리고 쓸쓸함이 차례로 번진다. 특히 김현식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노래에는 조금 더 짙은 그늘이 드리워진다. 같은 멜로디라도 그의 목소리를 지나면 노래의 색이 달라진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라는 제목도 이 목소리들과 잘 맞는다. 비에 젖은 풍경은 선명하지 않다. 색과 색의 경계가 조금씩 번지고, 멀리 있는 것은 흐릿해진다. 세 사람의 목소리도 그렇게 한 곡 안에서 번져 하나의 풍경을 만든다.

김현식의 목소리로 남은 시간

김현식은 1990년 11월 1일 세상을 떠났다. 이 노래를 녹음하던 무렵에는 이미 건강이 좋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다시 노래를 들으면, 그의 거칠고 애절한 목소리가 전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단순히 허스키한 목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곧 사라질 시간을 붙잡고 노래하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김현식의 목소리가 들어오는 순간 이 노래는 조금 더 깊어진다. 비 오는 날의 낭만만이 아니라, 사라진 사람과 사라진 시절에 대한 그리움까지 함께 묻어난다.

아마 나는 김현식의 죽음을 알고 난 뒤 이 테이프를 샀을 것이다. 정확한 날짜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의 부고가 이 음반을 고르는 데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대학로의 레코드가게에서 한참을 고르다가 그의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를 손에 들고 나왔던 장면이 아직도 어렴풋이 남아 있다.

기억은 빗물에 번진 수채화처럼 남는다

사람의 기억은 참 묘하다.

레코드가게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대학로 어느 골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테이프를 산 뒤 어디에서 처음 들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몇몇 장면은 여전히 남아 있다.

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스무 살 무렵의 나. 대학로의 어느 레코드가게. 한참 동안 무엇을 살지 고민하던 시간. 손에 들고 나온 카세트테이프. 그리고 비가 올 때마다 다시 들려오는 세 사람의 목소리.

오래된 기억도 비에 젖은 수채화와 닮아 있다. 선명한 부분과 흐릿한 부분이 함께 남아 있다. 어떤 장면은 사라졌고, 어떤 감정은 이상할 만큼 또렷하게 남아 있다.

레코드가게도 사라졌을 것이고, 카세트테이프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김현식 역시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음악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래된 노래가 좋은 이유

오래된 음악이 좋은 이유는 노래만 들려주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노래를 듣던 시절과 그때의 나까지 함께 데려오기 때문이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는 내게 그런 노래다. 단순히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노래가 아니다. 대학로의 레코드가게와 카세트테이프, 김현식의 부고를 듣고 난 뒤의 마음, 그리고 스무 살 무렵의 나를 함께 불러오는 노래다.

오늘도 이 노래를 다시 듣는다.

창밖으로 비가 내리고, 오래된 기억들은 빗물에 번진 수채화처럼 천천히 되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