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온 경험도 유전자에 흔적을 남길까: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를 읽고

유전자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것이고, 평생 바꿀 수 없는 조건이라고 생각해 왔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전 정보가 외모와 체질, 질병 가능성에 영향을 주고, 그 정보가 다시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는 설명은 꽤 분명해 보였다.

안젤리나 졸리가 유전자 검사 결과를 바탕으로 유방암 예방 수술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그런 생각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특정 유전자 변이가 있으면 질병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사람은 자신이 물려받은 유전적 조건에서 쉽게 벗어나기 어렵다고 여겼다.

그런데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를 읽으며 그 생각이 조금 흔들렸다. 유전자는 변하지 않는 운명의 판결문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음먹기에 따라 자유롭게 고쳐 쓰는 메모장도 아니었다.

  • 제목: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
  • 부제: 환경과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유전체에 관한 행동 후성유전학의 놀라운 발견
  • 저자: 데이비드 무어
  • 역자: 정지인
  • 출판사: 아몬드
  • 출간일: 2023년 9월 18일
  • 분량: 540쪽
  • ISBN: 9791192465111

유전자는 바뀌지 않아도 읽히는 방식은 달라진다

이 책이 말하는 핵심은 DNA 염기서열 자체가 경험에 따라 마음대로 바뀐다는 것이 아니다.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더라도 환경과 경험에 따라 그 유전자가 작동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하면 유전자는 설계도이고, 경험과 환경은 그 설계도를 어느 정도 읽을지를 조절하는 장치에 가깝다. 어떤 유전자는 더 활발하게 작동하고, 어떤 유전자는 억제될 수 있다.

다만 스위치라는 표현도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다. 단순히 켜짐과 꺼짐으로 나뉘기보다는 조명의 밝기를 조절하는 장치에 더 가깝다. 같은 유전자라도 발현되는 정도가 강해질 수도 있고 약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트레스, 영양 상태, 운동, 수면, 흡연, 성장 환경 같은 요소들이 유전자의 발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설명은 꽤 강하게 다가왔다. 우리가 살아가며 겪은 경험이 몸 안에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이 유전자의 작동 방식에 관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 놓는다.

유전자가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유전자를 읽는 방식은 달라질 수 있다.

숙명론도 아니고 자기계발식 낙관도 아니다

후성유전학을 접하면 자칫 모든 것을 생활습관의 문제로 단순화하고 싶어진다.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하고 잠을 잘 자면 질병 관련 유전자를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을 것처럼 느끼기 쉽다.

하지만 이 책은 그렇게 단순한 결론으로 가지 않는다. 생활습관만으로 타고난 유전자 변이를 없앨 수는 없다. 좋은 환경이 모든 위험을 지워 주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유전자가 모든 것을 이미 결정해 버렸다고 말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후성유전학은 숙명론도 아니고, 노력하면 무엇이든 바꿀 수 있다는 자기계발식 낙관도 아니다. 오히려 유전과 환경의 관계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람은 태어날 때 받은 유전자의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다. 타고난 조건과 살아오며 경험한 환경이 계속 상호작용하면서 현재의 몸과 마음을 만들어 간다. 이 지점에서 책은 과학책이면서 동시에 인간에 대한 책처럼 읽힌다.

책에서 산업으로 이어진 관심

이 책을 읽고 나서 후성유전학뿐 아니라 유전체를 분석하는 기술과 산업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겼다. 그러다 일루미나라는 기업을 알게 되었고, 아주 적은 금액을 투자했다.

일루미나는 후성유전학만을 연구하는 회사라기보다는 유전체를 읽고 분석하는 기술과 장비를 제공하는 기업에 가깝다. 유전체 연구와 정밀의료가 발전하려면 더 많은 생물학적 데이터를 읽고 분석해야 한다. 그렇다면 데이터를 읽어 내는 기반 기술의 중요성도 커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금광을 직접 찾기보다 금광을 찾는 사람들에게 삽과 곡괭이를 파는 기업에 관심을 둔 셈이다.

물론 책 한 권을 읽고 관련 산업의 성장 가능성을 느꼈다고 해서 해당 기업의 투자 가치가 자동으로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뛰어난 기술을 가진 기업이라도 경쟁 심화, 연구개발 비용, 시장 성장 속도, 경영 판단, 규제 같은 변수에 따라 실적과 주가는 달라질 수 있다.

나 역시 큰 확신을 가지고 투자한 것은 아니다. 새롭게 알게 된 분야를 조금 더 관심 있게 지켜보기 위해 소액을 투자했다. 주식을 보유하면 자연스럽게 기업의 기술과 실적, 산업의 변화를 계속 살펴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투자는 수익을 위한 투자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지적 투자이기도 했다.

유전체 산업까지 이어진 질문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는 내가 알고 있던 유전자의 개념을 완전히 뒤집은 책이라기보다, 그 개념을 훨씬 넓혀 준 책이다. 유전자는 변하지 않는 운명의 판결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음먹기에 따라 자유롭게 수정할 수 있는 메모장도 아니었다.

우리는 타고난 설계도를 가지고 태어난다. 하지만 삶의 환경과 경험은 그 설계도를 읽는 방식에 계속 영향을 준다. 그리고 그 복잡한 과정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영역이 많이 남아 있다.

어쩌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명확한 답을 주는 데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유전자와 인간의 삶 사이에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거대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 있다.

이 책은 유전자를 단순한 운명으로만 받아들였던 사람에게 좋은 질문을 던진다. 과학책이지만 삶과 몸, 환경과 선택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 이 글에서 언급한 기업과 주식은 개인적인 독서 경험과 관심을 기록한 것이며, 특정 종목에 대한 매수나 매도 추천이 아니다. 주식투자는 원금 손실이 발생할 수 있으며, 투자 결정은 기업의 재무 상태와 사업 전망, 산업 환경, 경쟁 상황 등을 직접 확인한 뒤 본인의 판단과 책임으로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