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해나의 소설집 『혼모노』를 산 것은 배우 박정민의 추천 때문은 아니었다. 책을 받아보고 나서야 띠지에 적힌 추천사를 봤다. ‘넷플릭스보다 재미있다’는 식의 문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워낙 강렬한 문구여서 지금도 『혼모노』를 생각하면 함께 떠오른다.
표제작 「혼모노」도 좋았다. 흥미롭고 영리한 작품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니, 내가 이 소설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었고 가장 오래 기억한 작품은 따로 있었다.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였다.
책 정보
- 제목: 『혼모노』
- 저자: 성해나
- 출판사: 창비
- 출간일: 2025년 3월 28일
- 분량: 368쪽
- ISBN: 9788936439743
어린 시절의 동네와 뒤늦게 알게 된 장소
나는 어린 시절을 후암동과 용산동에서 보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내가 살던 곳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 전혀 몰랐다. 대학에 간 뒤에야 남영동 대공분실의 존재와 그곳에서 벌어진 일을 알게 됐다.
그곳은 1987년에 박종철 열사가 고문으로 숨진 곳이었다.
그래서 「구의 집」은 나에게 단순히 한국 현대사의 한 장소를 소재로 한 소설로만 읽히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내가 아무것도 모른 채 가까이에서 살아갔던 공간이 소설 속에서 다시 나타난 느낌이었다.
지금은 용산이 많이 달라졌다. 해방촌과 용리단길은 젊은 사람들이 찾는 유명한 장소가 됐다. 맛집과 카페를 찾아 사람들이 몰리고, 용산은 서울에서도 가장 빠르게 변화하는 동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그 화려한 거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영역 근처에, 지금은 민주화운동기념관이 된 옛 남영동 대공분실이 있다. 용산을 찾는 젊은 사람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실 나 역시 그곳에서 가까이 살면서도 몰랐으니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악의보다 무서운 성실함
「구의 집」에서 내가 가장 흥미롭게 본 인물은 건축가의 제자 구보승이었다.
구보승은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다. 오히려 목적의식이 분명한 사람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목적을 이해하고, 그 목적에 가장 잘 맞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쏟아붓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만드는 공간이 무엇을 위해 사용되는가보다, 그 목적에 얼마나 잘 부합하는가였던 것처럼 보인다.
바로 그 점이 무섭다.
악의를 가진 사람만이 끔찍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자기 일에 성실하고, 유능하고, 주어진 목적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사람도 그 목적이 옳은지 묻지 않는 순간 얼마든지 악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구보승은 자신이 만든 건물에 이름을 남기지 않는다. 세상은 그가 그 공간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은 안다.
어디를 왜 그렇게 설계했는지, 어떤 동선을 고민했고, 어떤 목적을 위해 창문과 계단과 방을 배치했는지 자신만은 알고 있다.
나는 그 점이 이 소설에서 가장 무겁게 느껴졌다.
세상은 몰라도 자신은 아는 것.
자신의 이름이 역사에 남지 않았다고 해서 자신이 한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더 쉽게 숨을 수 있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게서만은 벗어날 수 없다.
목적을 묻지 않는 사람
물론 그 시대를 지금의 기준으로 쉽게 판단할 수는 없다. 국가권력이 모든 것을 압도하던 시기였고, 많은 사람들은 침묵하거나 모른 척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구보승은 단순히 시대의 옆에 서 있었던 사람은 아니다. 그는 주어진 목적을 향해 걸어간 사람이다.
이 대목에서 문득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이야기한 ‘악의 평범성’이 떠올랐다.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아이히만은 괴물 같은 악인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과 업무를 충실하게 수행한 관료의 모습에 가까웠다. 자신이 하는 일의 결과를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주어진 목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데 몰두한 사람.
구보승 역시 단순한 악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일에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이다. 다만 자신이 수행하는 목적이 옳은지 묻지 않았을 뿐이다.
목적의식은 있었지만, 그 목적이 옳은지 묻는 의식은 없었다.
나는 「구의 집」을 읽으며 이 생각을 가장 오래 했다. 표제작 「혼모노」는 읽는 순간 재미있고 강렬했다. 하지만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는 내 어린 시절의 기억과 실제 역사의 장소까지 함께 떠올리게 했다.
내가 어린 시절 살았던 동네 가까이에 있었던 장소.
그때는 전혀 몰랐고 대학에 간 뒤에야 알게 된 건물.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소설 속에서 다시 만난 갈월동 98번지.
그래서 내게 『혼모노』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작품은 표제작 「혼모노」가 아니다.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다.
읽고 난 뒤 남은 생각
이 소설은 실제 역사의 장소를 소재로 삼았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실제로 존재했고,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이라는 사실도 남아 있다. 소설 속 이야기가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 허구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 공간을 누군가는 설계하고 건축했다. 좁은 창과 계단, 조사실과 동선을 누군가는 생각해냈다. 그리고 적어도 누군가는 그 공간이 무엇을 위해 쓰일지 알고, 그 목적에 맞게 자신의 능력을 쏟아부었을 것이다.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는 바로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 소설이었다.
마무리
『혼모노』는 표제작의 강렬함만으로도 읽을 이유가 있는 소설집이다. 하지만 내게 오래 남은 것은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였다. 역사적 장소를 다룬 소설을 넘어, 자신이 하는 일이 어디에 쓰이는지 묻지 않는 사람의 책임을 생각하게 만든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