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MBC에서 방영했던 미국 드라마 〈머나먼 정글〉을 기억한다. 이 글은 그 드라마의 오프닝으로 내 기억에 남은 The Rolling Stones(롤링 스톤스)의 〈Paint It Black〉에 대한 Paint It Black 리뷰이자, 토요일 오후 TV 앞에 앉아 있던 어린 시절의 장면에 대한 기록이다.

토요일 오후에 남은 드라마 한 장면
〈머나먼 정글〉은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였다. 당시에는 토요일에도 학교에 갔던 시절이니,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이 드라마를 봤던 것 같기도 하다. 정확한 시간은 기억나지 않지만, 토요일 낮에 학교에서 돌아와 TV 앞에 앉았던 장면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정작 드라마의 구체적인 줄거리나 마지막 장면은 이제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등장인물 가운데서는 머리띠를 두르고 거칠면서도 부하들을 챙기던 Anderson 중사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Terence Knox라는 배우 이름보다도 그냥 ‘앤더슨 중사’로 기억에 남아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주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드라마의 오프닝 음악이다.
The Rolling Stones의 〈Paint It Black〉이다.
처음부터 귀를 붙드는 독특한 소리와 빠르게 몰아치는 리듬, 그리고 화면을 스쳐 지나가던 밀림과 헬리콥터, 전쟁터의 병사들. 어린 시절의 내게 이 노래는 The Rolling Stones의 음악이기 전에 〈머나먼 정글〉의 음악이었다.
〈Paint It Black〉이라는 강렬한 제목
The Rolling Stones의 노래를 아주 많이 아는 것은 아니다. 세계적인 록 밴드라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고, 유명한 대표곡들 정도를 들어온 수준이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Paint It Black〉은 유독 오래 기억에 남았다.
곡의 제목부터 강렬하다. 세상의 모든 것을 검게 칠하고 싶다는 말이다. 음악은 빠르고 힘차게 달려가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은 밝지 않다. 상실과 절망, 죽음 같은 어두운 정서가 노래 전체를 감싸고 있다.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에 베트남전을 다룬 〈머나먼 정글〉의 오프닝과 그렇게 잘 어울렸는지도 모르겠다. 빠르게 달려가는 리듬은 긴박한 장면과 맞물리고, 그 안쪽의 어두운 감정은 전쟁 드라마가 가진 불안과 잘 겹친다.
처음부터 분위기를 바꾸는 시타르 소리
이 곡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도 처음부터 들리는 시타르 소리다. The Rolling Stones 하면 흔히 Mick Jagger와 Keith Richards를 먼저 떠올리지만, 당시 멤버였던 Brian Jones가 연주한 시타르는 이 곡에 독특하고 불안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Paint It Black〉은 1966년에 발표된 곡이다. Mick Jagger와 Keith Richards의 곡으로 알려져 있고, 인도 음악과 중동, 동유럽풍의 느낌이 섞인 raga rock 곡으로도 자주 설명된다. 이런 설명을 몰라도 첫 소리를 듣는 순간 어딘가 낯설고 불안한 세계가 열린다는 느낌은 바로 다가온다.
어린 시절 TV 앞에서 이 노래를 들었을 때도 그랬다. 노래의 배경을 몰랐고, 가사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시작 부분의 소리만으로 화면의 밀림과 헬리콥터, 병사들의 얼굴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좋은 오프닝 음악은 드라마의 줄거리보다 먼저 기억에 박히기도 한다.
미국판 《Aftermath》의 첫 곡
이 노래가 실린 앨범을 찾아보다가 재미있는 사실도 알게 됐다. 보통 〈Paint It Black〉은 The Rolling Stones의 앨범 《Aftermath》의 대표곡처럼 알려져 있지만, 정작 영국에서 처음 발매된 원래 앨범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당시에는 같은 앨범이라도 영국판과 미국판의 수록곡이 달랐다. 영국판 《Aftermath》에는 〈Mother’s Little Helper〉, 〈Out of Time〉, 〈Take It or Leave It〉, 〈What to Do〉가 들어 있었지만, 이 곡들은 미국판에서는 빠졌다. 대신 미국판의 첫 곡으로 들어간 노래가 바로 〈Paint It Black〉이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이상하기도 하다. 《Aftermath》를 대표하는 곡처럼 느껴지는 노래가 정작 The Rolling Stones의 본국에서 발매된 원래 앨범에는 없었다니 말이다. 하지만 미국판 《Aftermath》를 기준으로 보면 〈Paint It Black〉은 앨범의 문을 여는 곡이다. 그래서 이 글에도 미국판 《Aftermath》의 앨범 자켓을 함께 넣었다.
《Aftermath》는 The Rolling Stones에게도 중요한 앨범이다. 초기에는 미국의 블루스와 R&B 곡을 많이 연주했던 이들이 이 앨범에서는 전곡을 자신들의 곡으로 채웠다. The Rolling Stones가 단순히 미국 음악을 연주하는 영국 밴드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음악 세계를 본격적으로 만들어가기 시작한 시기의 앨범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곡만으로도 오래 남는 음악
물론 나는 The Rolling Stones의 모든 앨범을 섭렵한 팬은 아니다. 오히려 대표곡 몇 곡을 아는 평범한 음악 애호가에 가깝다. 하지만 음악을 좋아하는 데 반드시 한 밴드의 모든 앨범과 역사를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노래는 한 곡만으로도 평생 기억에 남는다. 내게 〈Paint It Black〉은 그런 노래다.
토요일에도 학교에 갔던 시절,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TV를 켰다. 화면에는 베트남의 밀림과 헬리콥터가 나타났고, 어딘가 낯설고 불안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드라마의 마지막은 기억나지 않는다. 누가 살아남았고, 누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선명하지 않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노래만은 아직도 기억난다.
음악은 가끔 이야기보다 오래 남는다.
〈머나먼 정글〉은 오래전에 끝났지만, The Rolling Stones의 〈Paint It Black〉이 시작되는 순간이면 나는 다시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그 시절로 돌아간다.
참고한 정보
- The Rolling Stones, 〈Paint It Black〉: 1966년 발표, 미국판 《Aftermath》 수록
- 《Aftermath》: 영국판 1966년 4월 Decca Records 발매, 미국판 1966년 6월 London Records 발매
- 〈머나먼 정글〉 원제: Tour of Duty, CBS 방영 드라마
- 앨범 커버: Cover Art Archive / MusicBrainz, 미국판 《Aftermath》 release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