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 세상을 해방시키지는 못했지만, 당신은 해방되었다

책을 읽는 내내 웃기도 하고,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다.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오래 생각한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라는 질문이었다. 평생 신념을 지킨 한 사람의 장례식을 따라가다 보니, 그가 이루지 못한 일보다 살아 있는 동안 사람들에게 남긴 흔적이 마음에 들어왔다.

전봇대에서 시작된 웃음과 먹먹함

소설은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죽었다는 황당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평생 사회주의라는 신념을 지키며 살아온 빨치산 출신 아버지의 마지막이 전봇대라니. 비극적이면서도 우스꽝스러운, 그야말로 블랙코미디다.

정지아는 분단과 이념 갈등, 가족이 겪은 고통을 이야기하면서도 유머를 놓지 않는다. 웃으며 읽다가 어느 순간 가슴이 먹먹해진다. 장례식에 조문객이 찾아올 때마다 새로운 사연이 펼쳐지는 구성도 좋았다. 다음에는 어떤 사람이 올지 궁금해서 책을 쉽게 덮을 수 없었다.

딸이 몰랐던 아버지의 인생

아버지는 고지식하고 고집스러운 사람이다.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가족은 그 때문에 적지 않은 고통을 겪었다. 그 선택이 가족에게 남긴 상처까지 옳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나는 평생 신념을 지켜낸 아버지가 존경스러웠다. 답답함과 존경이 함께 남는 인물이었다.

조문객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딸은 자신이 알지 못했던 아버지를 발견한다. 누군가에게는 고집스러운 사회주의자였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어려울 때 손을 내밀어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그가 주장한 말이나 사회적 성취만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누구와 관계를 맺었고, 그 사람들에게 어떤 기억을 남겼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장례식은 딸에게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아버지의 삶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맞담배를 피우며 나눈 대화

노란 머리로 염색한 베트남계 다문화 소녀와 아버지가 맞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보통 어른이라면 먼저 담배부터 끄라고 야단쳤을 것이다. 아버지는 소녀의 이야기를 듣고 다독인다. 그 장면에서 나는 아버지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보았다.

  • 출신이나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시선.
  • 훈계에 앞서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태도.
  • 말로 내세운 신념을 일상의 행동으로 옮기는 삶.

자신의 생각에는 고집스러울 만큼 굳건한 사람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따뜻했다. 아버지가 추구한 세상도 결국 이런 관계 속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닐까.

신념을 지키는 일과 사람을 존중하는 일

이 대목에서는 지금 우리 사회가 떠올랐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적대하고, 이해하기보다 공격하는 일이 낯설지 않다. 이념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모습을 볼 때면 씁쓸하다.

소설 속 아버지는 신념을 지키느라 많은 것을 잃었다. 적어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신념을 이용한 사람은 아니었다. 자기와 다른 사람에게도 손을 내밀었다는 점이 더 마음에 남는다. 신념을 지키는 것과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함께할 수 있는 일이다.

아버지는 혁명으로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러나 장례식에 찾아온 사람들의 사연을 보면, 그와 인연을 맺은 이들의 삶에는 분명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의 작은 세상을 바꾸는 삶도 충분히 의미 있다고 느꼈다.

아버지와 딸, 두 사람의 해방

책을 덮고 제목을 다시 생각했다. 내가 읽은 ‘해방’에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평생 꿈꾸던 세상을 이루지 못했고, 분단과 이념이 남긴 상처를 안고 살았다. 내게 그의 죽음은 그 굴레에서 비로소 벗어나는 순간으로 읽혔다. 세상을 해방시키지는 못했지만, 당신은 해방되었다.

딸도 아버지의 삶을 새롭게 이해하면서 원망과 오해에서 조금씩 벗어난다.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의 기억이 아버지와 딸 사이에 쌓인 감정을 풀어준다. 죽음으로 시작한 이야기가 남은 사람의 해방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에 작가의 가족사가 깊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도 마음에 남았다. 정지아의 부모가 실제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읽으면 이들의 삶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전봇대라는 황당한 시작을 지나고 나니 제목의 두 글자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재미있어서 쉽게 덮지 못했고, 다 읽은 뒤에도 오래 생각하게 된 소설이었다. 서로 다른 생각을 좀처럼 인정하지 못하는 지금,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나 역시 누군가의 신념을 평가하기 전에 그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부터 보고 싶다.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표지
직접 촬영한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표지
  • 저자: 정지아
  • 출판사: 창비
  • 출간일: 2022년 9월 2일